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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기억을 깨우면, 평범한 삶도 소중한 역사가 된다 (출처: AI생성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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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평범한 인생은 없다, AI가 찾아낸 나의 역사
[이인규박사 브이로그: 70대 은퇴자, 말로 푸니 책이 되다]
서울 종로구의 한 낡은 단독주택. 박동수(72) 할아버지가 거실 소파에 앉아 스마트폰을 바라본다. 며칠 전, 딸이 설치해 준 앱 때문이다. "아빠, 이거 켜놓고 옛날 얘기만 하면 책으로 만들어 준대. 칠순 기념으로 하나 남기자."
동수 씨는 처음에 손사래를 쳤다. "내가 무슨 위인도 아니고, 평생 공장 다니며 애들 키운 게 다인데 쓸 게 뭐 있냐." 하지만 딸의 성화에 못 이겨 앱을 켰다. 화면에 '안녕하세요, 박동수 님. 오늘은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세요'라는 문구가 떴다.
기억의 창고, 질문으로 열다
"어린 시절이라… 뭐 별거 없는데. 6.25 끝나고 다들 배고팠지 뭐." 동수 씨가 무뚝뚝하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AI가 되물었다. "그때 가장 맛있게 드셨던 음식은 기억나세요? 어머니가 해주셨던 음식이라든가요."
동수 씨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음식… 그래, 수제비가 있었지. 멸치도 없이 맹물에 밀가루만 푼 건데, 어머니가 내 그릇에만 감자를 몰래 넣어 주셨어. 그게 뜨거워서 호호 불어 먹던 게 기억나네."
AI는 놓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어머니의 감자, 특별했겠네요. 그때 어머니는 어떤 표정이셨나요?" 동수 씨의 말문이 트였다. 잊고 지냈던 어머니의 얼굴, 동네 친구들과 뛰어놀던 골목길, 첫 월급을 타서 샀던 빨간 내복. 기억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흩어진 파편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동수 씨는 매일 저녁 30분씩 AI와 대화했다. 사우디 건설 현장에서 일했던 뜨거운 여름, 아내를 처음 만난 다방의 커피 냄새,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떨림. AI는 단순히 받아적는 게 아니었다.
"말씀하신 사우디 현장 에피소드는 '가장의 무게'라는 주제로 묶으면 좋겠어요. 그때 느끼셨던 외로움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AI는 동수 씨의 두서없는 기억들을 주제별로 분류하고, 빠진 고리들을 질문으로 채워 넣었다.
한 달이 지나자, AI는 그동안의 대화를 정리해 목차를 보여줬다. 1장. 감자 수제비와 어머니의 눈물 2장. 사우디의 모래바람, 그리고 가족 3장. 내 인생 최고의 선물, 세 아이 4장. 은퇴, 그리고 새로운 시작
"이게… 내 이야기라고?" 동수 씨는 화면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그저 하루하루 버티며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모아놓고 보니 치열하고 아름다운 한 편의 드라마였다.
가족에게 전하는 가장 귀한 유산
2주 뒤, 집으로 택배가 도착했다. 깔끔한 양장본 책 10권. 표지에는 젊은 시절 동수 씨가 활짝 웃고 있는 흑백 사진이 박혀 있었다. 제목은 <박동수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주말에 모인 가족들이 책을 돌려봤다. 손자가 물었다. "할아버지, 사우디에서 전갈한테 물릴 뻔했어요? 우와, 진짜예요?" 사위도 놀라며 말했다. "장인어른, 장모님한테 프로포즈하신 얘기는 처음 듣습니다. 되게 로맨틱하셨네요."
평소 무뚝뚝하던 동수 씨는 쑥스러운 듯 웃었지만, 어깨는 으쓱했다. 가족들은 그날 밤늦게까지 할아버지의 책을 읽으며 울고 웃었다. 그 어떤 유산보다 값진, '아버지의 시간'을 물려받은 것이다.
기록되지 않은 인생은 없다
동수 씨는 이제 친구들에게도 이 방법을 권한다. "야, 김 영감. 자네 월남 갔다 온 얘기, 그냥 두면 다 사라져. AI한테 말만 하면 다 써준다니까."
동수 씨는 서재에 꽂힌 자신의 자서전을 흐뭇하게 바라본다. 평범한 인생은 없다.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다. AI는 거창한 작가가 되어주진 않지만, 성실한 청취자가 되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역사로 만들어준다. 잊혀질 뻔했던 수많은 '박동수'들의 이야기가,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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