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야 한다

덕암/김균식 | 입력 : 2021/12/07 [08:30]

 

문명의 발달로 한겨울에도 속옷 차림으로 거실에서 지낼 수 있고 찌는듯한 여름에도 시원한 에어컨 앞에서 더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지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과거처럼 힘들어 못살겠다기보다는 조금 더 자극적이고 편리하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필요한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제 1차산업의 충족만으로는 행복할 수 없는 현실에 도달했다.

얼핏보면 지극히 편리하고 좋아진 것 같지만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부분을 엿볼 수 있다.

무릇 사람이란 생물학적으로는 아버지의 정기와 어머니의 몸을 빌려 태어나면서 성장과정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되는데 먹고 마시고 싸는 모든 것이 간접적인 자연의 섭리로 인한 것이니 어찌 자연의 일부라 하지 않겠는가.

하늘의 공기와 땅의 영양분으로 생겨난 곡식이나 땅위와 물속에서 자라는 생물들을 잡아먹는 먹이사슬의 최 상위 단계에서 군림한 덕분에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지만 적어도 춘하추동의 섭리마저 외면한다면 그 대가는 부메랑처럼 돌고 돌아오게 된다.

가령 추울 때는 더러 매서운 추위도 피부가 기억할 만큼 바깥바람도 쐬어보고 폭염에는 무더위에 땀도 흘려봐야 몸이 자연을 체감하고 기억하며 자연과 하나됨을 알 터인데 조금만 불편해도 피하려는 이기적이고 안일한 습관에 젖어 문명에 의지하는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필자 또한 이런 점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지만 자연과 어우러지려는 노력이 적은 만큼 면역력 저하와 이름 모를 현대병에 시달리며 각종 약물에 노출되기도 하고 걷는 습관 또한 차량에 기대는 경향이 커지고 있다.

불과 수 십 년 전만해도 당연히 잠들 수 있었던 온돌방은 침대없이 못 자고 음식 한 가지라도 끓여먹던 조리보다는 배달음식에 전화하는 것이 당연시 되어 버렸다.

이쯤에서 필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문명의 혜택을 폄하 하자거나 케케묵은 꼰대의 넋두리를 펼치자는 게 아니라 누릴 건 누리지만 본질을 잊지 말자는 것이다.

사람이 어떤 기능이든 안 쓰면 퇴화하고 자주 쓰면 진화하게 마련이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잊지 말아야 할 육체적 본능이나 기능이 오랜 기간 방치하면 제 기능을 잃어버리는 게 당연한 이치다.

수학공식보다 비 오는 강수량을 먼저 짐작해야하고 영어발음보다 새소리·물소리가 익숙해야 하며 배달 오는 치킨보다 병아리를 키워볼 줄 알아야 한다.

과연 지금의 청소년들과 기성세대들이 알고 있는 꽃 이름이 얼마나 되며 겨울 산 뿌리식물의 싹을 볼 수 있는 시력은 얼마나 될까.

말은 국토균형발전법까지 정해두고 막대한 예산을 낭비하지만 갈수록 심해지는 도시와 농촌간의 격차는 뭐라 설명할 것인가.

지금처럼 도시를 향한 이농현상이 급증한다면 안 그래도 좁은 국토에 수도권의 인구밀도는 점차 높아질 수밖에 없으며 지방의 공황상태는 빈집속출로 악순환의 반복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남자가 돈을 벌고 여자가 아이를 낳아 키우며 집 한 칸씩 마련하여 알뜰하게 사는 게 삶의 기본적인 이치일진대 어쩌다 정반대의 사회적 풍토가 당연시 되어버리니 누가 아이를 낳고 키울 것이며 사람이 없는데 문명이 아무리 발달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제 십년도 되지 않아 귀성인파라는 단어가 전설이 될 것이며 또 십년이 지나면 사람이 직접 차를 운전했다는 말을 아이들이 믿지 않을 것이며 십년이 더 지나면 하늘길마다 윙윙거리는 이동수단이 채워질 날이 올 것이다.

아무리 문명이 발달하더라도 피하지 못할 일이 먹고 자고 싸는 것인데 그 기반은 다를 지라도 자연의 섭리만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아무리 날고 긴들 하늘에서 눈·비는 올 것이고 자연은 기름진 토양을 만들 것이며 땅위와 물속의 생물들은 여전히 인간의 먹이사슬 하위층에 머물 것이기에 자연을 아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래 전 중국에서 참새들이 곡식을 축낸다고 대대적으로 잡은 적이 있었는데 이듬해부터 병충해가 극심하여 몇 배의 대가를 치른 적이 있었다.

이처럼 자연의 이치는 어느 정도 고통을 수반함으로써 얻어지는 게 있는데 여자가 아이 낳기를 거절하고 남자가 일하기를 싫어하며 그렇게 되도록 부추기고 조장하며 그 대가로 표심을 얻어 권력을 잡았다면 이는 문어가 제 다리 잘라먹는 것과 뭐가 다를까.

권한다고 부화뇌동 하는 선량하고 순진한 국민들도 문제지만 광복이후 번갈아가며 권력을 나눠먹는 통에 갈수록 몸은 편리해지는 반면 갈수록 정신은 피폐해지고 있는 게 현실 아니던가.

공정이니 인권존중이니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남녀간의 구분과 아이·어른의 질서가 없어진다면 약육강식의 동물세계와 뭐가 다를까.

요즘처럼 질병이 창궐하여 사는 게 힘들어도 오로지 권력에만 눈이 어두워 광란의 춤을 추는 일부 한량들의 나댐을 보면서 자연의 섭리라도 제대로 지키면 어떨까 싶다.

어째 수도권 6인 이하 비수도권 8인 이하로 규제하는 당일에도 대선캠프의 선거유세장에는 구름같은 인파들이 몰려도 누구 하나 토를 달지 못하는 것이며 무슨 바이러스가 사람 봐가며 확진되는가.

방역당국 관계자들은 눈을 장식용으로 달고 다니는 것이며 방역법의 적용이 형평성을 잃고 있음을 만인들이 보고 있지 않은가.

모든 유권자의 98%가 어이가 없어 묵묵히 지켜보고 있는데 2%가 온갖 오두방정을 떨고 신문·방송의 장단은 여전히 요란한 꽹과리 소리를 울린다.

정치란 자연의 이치를 존중해야지 이를 악용하여 권력을 탐하면 반드시 재앙이 따르기 마련이다.

오늘은 24절기 중 21번째인 ‘대설’이다. 눈이 많이 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적설량이 많으면 이듬해 풍년이 온다는 전설이 있다.

과학적으로 계산해보면 강수량이 많아 지표면에 스며드는 물이 많으니 당연히 생명력이 풍부하다는 것과 같은 이치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걸리는 시간은 스무살 성장기와 칠십 쇠퇴기를 빼고 먹고 자고 난 시간까지 빼면 불과 30년도 채 되지 않는다.

문득 고드름이 길게 달리고 폭설에 허벅지까지 푹푹 빠지던 강원도 태백의 설경이 떠오르는 건 오랫동안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필자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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