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일

[팔도강산] 강화8경

갑곶돈대 / 광성보 / 마니산(참성단) / 보문사 / 연미정 / 적석사 / 전등사 / 초지진

서동식 | 기사입력 2024/10/2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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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강산] 강화8경
갑곶돈대 / 광성보 / 마니산(참성단) / 보문사 / 연미정 / 적석사 / 전등사 / 초지진
서동식 기사입력  2024/10/21 [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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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강산] 강화8경

 

갑곶돈대 / 광성보 / 마니산(참성단) / 보문사 / 연미정 / 적석사 / 전등사 / 초지진

 

 

갑곶돈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룡길 26 (갑곳리

 

돈대는 해안가나 접경 지역에 돌이나 흙으로 쌓은 소규모 관측·방어시설이다. 병사들이 돈대 안에서 경계근무를 서며 외적의 척후 활동을 비롯한 각종 수상한 정황을 살피고 대처한다. 적이 침략할 때는 돈대 안에 비치된 무기로 방어전을 펼친다. 조선시대 강화도 해안에 돌로 쌓은 돈대 53개가 설치됐다. 갑곶돈대는 1679년(숙종 5) 5월에 완성된 48돈대 가운데 하나이다. 

48돈대는 황해도·강원도·함경도 승군 8,900명과 어영청 소속 어영군 4,262명이 80일 정도 걸려서 쌓았다. 돈대 축조를 기획하고 감독한 이는 병조판서 김석주였고 실무 총괄은 강화유수 윤이제였다. 갑곶돈대는 망해돈대·제승돈대·염주돈대와 함께 제물진의 관할 하에 있었다. 외부에서 강화로 들어오는 관문과 가까워 중요성이 더욱 강조된 돈대이다. 포좌가 있는 본래의 갑곶돈대는 옛 강화대교 입구의 북쪽 언덕에 있었다. 지금 사적으로 지정된 갑곶돈대는 제물진과 강화 외성의 일부이다. 

 

 

 

광성보

 

인천 강화군 불은면 덕성리 833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로, 1658년(효종 9)에 설치됐다. 화도돈대·오두돈대·광성돈대와 1874년(고종 11)에 축조된 오두정포대를 관할하였다. 

1745년(영조 21)에 성을 고쳐 쌓으면서 성문을 만들어 안해루(按海樓)라 하였다. 이곳은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격전지였다. 초지진과 덕진진을 거쳐 광성보에 이른 미군은 상륙하기 전에 포격으로 광성보를 초토화했다. 이미 병인양요 때 광성보에 근무한 바 있던 어재연이 포격을 피할 안전한 장소에 군사들을 숨겼다가 상륙하는 미군에 맞서 싸웠다. 

 

조선군은 물러서지 않고 분전했으나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했다. 병사들 대부분이 전사했다. 미군은 광성보 전투 후 소득 없이 물러갔다. 미군의 처지에서 볼 때 신미양요는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쟁에서 패배한 사건이었다. 광성보 안에는 광성돈대, 어재연·어재순 형제의 충절을 기리는 쌍충비각, 이름을 알 수 없는 전사 장병들을 모신 신미순의총, 손돌목돈대, 용두돈대가 있다. 

 

 

 

마니산(참성단)

 

인천 강화군 화도면 마니산로 675번길 18

 

마니산은 해발472.1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곳에서 보면 그 모양이 아름답고 웅장한 명산으로 참성단은 그 중간 봉우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올라서서 보면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섬이 보이고 맑은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입니다.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은 고려사나 신동국여지승람에는 단군이 천제를 올리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데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단군은 북한의 묘향산에서 출현하여 그후 평양에 도읍하여 국호를 조선이라 불렀고 다음에 기자에게 나라를 넘겨주고 산신이 되었다라고만 되어있어 마니산과 참성단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지 않으나 여지승람에는 단군이 평양에 도읍한 후 황해도에 있는 구월산에 옮겨 산신이된후에 이 마니산에서 지냈다는 기록이 나와있습니다. 

 

 

 

보문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삼산면 삼산남로828번길 44 (매음리

 

바다를 건너 차량으로 15분간 들어가면 낙가산 서쪽바다가 굽어 보이는 곳에 보문사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선덕여왕 4년(635) 회정대사가 금강산으로부터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절을 세우고 보문사라 하였습니다. 보문사는 우리나라 3대 관음성지로서 절을 창건 후 14년이 되던 해에 고씨성을 가진 어부가 바닷가에서 불상과 나한상 22구를 그물로 낚아올려 절의 우측 석굴에 봉안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로부터 이 석굴에 기도를 하면 기적이 이루어져 많은 신도들이 이곳을 찾고 있습니다. 절 뒤편에는 마애석불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앞에서 보이는 서해풍광 또한 일품입니다. 보문사 경내에는 300여명의 승려들이 수도했을 당시 사용하였다는 큰 맷돌과 향나무, 1975년에 주조한 범종이 있습니다.

 

 

 

연미정

 

인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242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강화도 동북단에 이르러 서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했다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를 주었다고도 한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정자에 오르면 북으로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수령의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이곳은 과거에 민간인통제구역이어서 일반인의 출입에 제한이 있었으나, 2008년 민간인통제구역에서 해제되어 현재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탐승하고 있다.

 

 

 

적석사

 

인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210-3

 

적석사는 고려산 서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고구려때 천축국 스님이 고려산에 올라 다섯색의 연꽃이 피어있는 오련지를 발견하고 다섯송이의 연꽃을 날려 그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절을 세웠다 합니다. 그 중 붉은 연꽃이 떨어진 곳에 적련사를 세웠는데 그곳이 이 절의 전신입니다. 적석사 뒤편 산정상은 낙조봉이라 불리며 이곳에서의 낙조는 강도팔경의 하나로 꼽힐만큼 아름답습니다. 

 

 

 

전등사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온수리, 전등사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을 간직한 삼랑성내에 아늑히 자리잡고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에 아도화상이 처음 창건하고 진종사(眞宗寺)라 이름 지었습니다. 그후 고려 충렬왕비 정화궁주가 이 절에 귀한 옥등을 시주했다해서 전할전, 등불등자(傳燈寺)를 써서 전등사로 개명한 사찰입니다. 이절의 입구에 있는 대조루 밑을 지나들어가면 정면에 보물 제178호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보전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대웅전 안에는 1544년 정수사에서 판각되어 옮겨진 법화경 목판104매가 보전되고 있다. 명부전 맞은편 왼쪽 언덕을 약100m 오르면 조선 왕실의 실록을 보관했던 정족산 사고터가 복원되어 있다. 강화에는 마니산에 사고를 설치하였다가 1660년 이곳 전등사 경내로 옮겨 1678년이래 실록 및 서적을 보관하였고 그후 정족산 사고가 복원되었다. 경내에 있는 보물제393호 범종은 중국종으로 중국 하남성의 숭명사에서 북송시대(1097), 고려 숙종2년에 주조된것으로 우리나라 종과는 달리 종머리에 음관이 없고 용머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16개의 연잎이 둘려 있는것을 볼수 있으며 견대와 요대사이에는 8괘가 둘려있어 특이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1866년 병인양요때는 승군 50명이 전투에 참가 하기도한 호국 불교의 사찰로 당시 조선수비대장이던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전등사 동문 입구에 세워져 있습니다. 

 

 

 

초지진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해안동로 58

 

강화의 해안 경계 부대인 12진보 가운데 하나이다. 

병자호란 이후 서해안 수비체제가 강화도 중심으로 개편되면서 경기 서남부 해안의 진(鎭)들이 강화도와 강화도 근처로 옮겨오게 된다. 1653년(효종 4)에 남양의 영종진이 인천부 자연도로 옮겨왔다. 영종진이 자연도에 자리 잡으면서 섬의 이름도 영종도로 바뀌게 된다. 영종진을 남양에서 자연도로 옮긴 것은 자연도가 해상에서 강화도로 진입하는 길목이라는 중요성 때문이다. 이제 영종도는 강화도를 지키는 1차 방어선의 기능을 하게 되었다. 

 

초지진은 1656년(효종 7)에 안산에서 옮겨왔다. 초지진에서 초지돈대·장자평돈대·섬암돈대를 맡아 지휘했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때 미군과 충돌했던 격전지이다. 1875년(고종 12) 일본 운요호 사건 때 상륙을 시도하는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이기도 하다. 당시 초지진을 지키던 조선군은 일본군을 격퇴했다. 패퇴한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영종도를 해코지했다. 이후 초지진은 허물어졌고, 초지진이 관할했던 초지돈대만 남았다. 

 

정비된 초지돈대 안에는 대포가 전시돼 있다. 돈대 옆 소나무에는 신미양요 혹은 운요호 사건 때 포탄 맞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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